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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마 로돌프가 4살 대 의사는 소아마비 진단을 내렸다.

의사는 아이가 다시는 걸울 수 없을 거라고 선고를 내렸다.

그녀는 미국 남부의 테네시주의 벽촌인 클라크빌에서 태어냤다.

1940년대에 이런 시골에서 받을 수 있는 의료혜택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루돌프는 22남매라는 대식구 가운데 20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역에서 짐을 나르는 인부였고 어머니는 가정부였다.

집안은 당연하게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윌마 루돌프에게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다.

적어도 어머니인 블랜치는 의사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매주 어머니는 버스로 45분이나 걸리는 내슈빌에 있는 병원에

땅을 데려가 열과 물을 이용한 물리치료를 받게 하였다.

의사는 매일 오기기 어려운 상황임을 이해하고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치료법을 가르쳤으며, 어머니는 루돌프에게 물리치료 해주는 것을 본  다른 형제들도

그걸 따라 배워, 루돌프는 물리치료를 하루에도 4번이나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프긴 하지만 최대한 다리를 사용하도록 부추김을 받았다.

"어머니는 내게 원하는 것은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보조기를 떼고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그 한가지의 예이다."

눈물어린 노력 끝에 루돌프는 여덟 살 때에는 보조기를 떼고 굽이 조금 높은

특수화를 신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활동량을 늘리기 위해 오빠들과 매일

야구를 해꼬 오빠들이 시간이 없으면 혼자러사도 야구는 계속하였다.

루돌프가 11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딸이 보조화를

한 쪽에 벗어 둔 채  뛰어다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루돌프는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말한다.

"나야말로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믿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이런 강한 결단력은 결국 1960년 올림픽에서 미국 여자선수로는 최초로

육상에서 금메달 3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한다.

1961년에는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는 최고의 상닌 제임스 E. 설리번상을 탔고

후에 올림픽 명예의 전당과 흑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어린시절 부터 윌마 루돌프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와 시합을 벌였다.

고등학교 때 다리의 유연성을 키우기 위해 야구부에 들었는데,

당시 루돌프는 한 게임당 최고 득점과 한 시즌 득점기록을 모두 간단히 깨기도 했다.

테네시 주립대학에서는 육상감독 에드 템플을 만났다.

템플로부터는 일당 정한 목표에 매진하는 놀라운 집중력을 배웠다.

템플은 테네세가 운영하는 여자육상팀 타이거벨스에[ 입단시험을 볼 것을 권했다.

루돌프는 훈련 첫 날 시골 농장을 가로질러 5마일을 쉬지 않고 달렸다.

결승선에 도달하기 전 몇 번 넘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테이프를 끊었다.

다음날에는 우전 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다

그만 뒤쳐져 먼지를 뒤집어쓴 채다치기만 하였다.

부상과 좌절 때ㅑ문에 루돌프는 육상선수가 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기하는 대신 가족들이 자신을 다시 걷게 하기 위해 들인 노력에

모든 생각을 집중했다. 다음날 돌아온 루돌프는 다시 경기를 시작했고

결국 고등학교 졸업 후 초청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정작 루돌프에게는 팀의 다른 선수들처럼 잘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이런 루돌프에게 어머니는 "의문은 그만 품고 운동이나 해"하고 말했다.

로둘프는 즉시 그 충고를 받아들여 어린 시절 다리를 치료할 때 처럼

두려움을 떨치려고 노력했고, 고동학교 3학년 때는 1956년 호주 맬버른 올림픽

출전권을 얻기도 했다. 결국 여자 400미터에서 동메달을 따서 집으로 돌아왔다.

루돌프는 구 후 목표를 점점 높였다. 타이거벨스의 최고 선수가 되기 위해

언제나 감독이나 팀 동료들이 하는 비판을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세 번이나 올림픽에 함께 출전했고 타이거벨스의 동료이기도 했던 메이 패그스 스타는

루돌프는 너무나도 남의 말을 잘 들었다. 올림픽 3관왕이 된 뒤에도 그런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회상을 하였다.

1959년 루돌프는 로마 올림픽 출전권을 얻었다. 

평가전에서는 200미터 경기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워 주변을 놀라게 했다.

로마에서 루돌프는 100미터와 2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따냈지만 두 번의 경기로 발목근육이

경직되어 곧 출전할 400미터 계주경기에 차질이 생겼다.

이 경기는 루돌프의 마지막 레이스였는데, 이미 그녀는 두개의 금메달을 딴 상태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닌 팀 동료들을 위해 금메달을 노린다고 말하곤 했다.

자신에게 아낌없는 충고를 해준 동료들에게 뭔가 보답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루돌프는 자신의 의지를 모두 시합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다리의 통증은 무시한 채 뛰기로 결정했다. 중간에 동료가 건넨 바통이 떨어져

선두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루돌프는 곧바로 다시 뛰어

상대를 추월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매력적이고도 훌륭한 연설자로서 루돌프는 1960년 올림픽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메달이 루돌프의 생활에 변화를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돌아오자 고향마을인 클라크 빌에서는 대형 퍼레이드를 벌이고 싶어 했지만

그런 이벤트가 백인들만의 잔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루돌프의 다음번 도전은 바로 이런 인종간의 장벽을 넘는 것이었다.

루돌프는 이벤트 주최측에 흑백이 오울리는 잔치가 아니라면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결국 그녀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루돌프의 승리를 기념하는 파티에는 테네시주에서는 

처음 열린 흑백 인종간의 조화로운 축제의 마당이 됐다.

육상선수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루돌프 자신의 아주 소박한 삶을 바랐다.

루돌프는 자서전 '윌마'에 이렇게 쓰고 있다.

"열하옵이나 스무실 나이에 성공해서 전 세계의 왕이나 여왕, 또 장관이나

교황등과 자리를 같이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하루딸리 자신의 진짜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실제로 루돌프는 돈을 벌기 위한 순회경기도 하지 않았으며

아마추어 선수로만 활약을 하다가 22세에 은퇴를 하였다.

육상인생을 끝낸데 대한 아쉬움을 느끼기도 전에 루돌프는 

어린시절 자신이 받은 후원과 애정을 다른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육상전문교사가 되는 과정을 밟았다.

교실에서 루돌프는 어린 아이들에게 성공이란 금메달을 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최슨을 다해 뭔가를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항상 강조했다.

 

"성공가도에 들어섰을 때 나는 신께 내가 왜 여기 서 있는지,

나의 잔정한 목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언제나 그 대답은 금메달이 아니었다."

1982년에 윌마 루돌프 재단을 만들어 빈민촌 아이들에게

사람들이 지켜야 할 원칙과 스포츠에 몰도하는 정신,

힘겨운 훈련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생전에 이 재단이야말로 자신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는

말을 했던 루돌프는 1994년 뇌종양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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